바람의 화원|이정명|밀리언하우스 책읽기

뿌리깊은 나무의 작가의 작품으로 작년에 SBS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히트친 작품~ 문근영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대로 책으로 읽겠다고 드라마 자체는 조금 보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책하고 드라마는 조금 다르구나...

화가들은 천재다.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의미를 뛰어넘어 그림으로 많은 걸 이야기하는 힘을 지닌 천재이다. 대학교 때 헤르메스의 기둥(송대방)을 읽고 도상학에 한참 빠져들어서 서양 미술 관련 책들을 엄청 독파하고 다닐 때 그냥 잘 그렸다..못 그렸다..라는 걸 넘어서 색 하나, 인물 하나, 소품 하나, 구성 하나, 장면 하나 하나가 다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엄청 놀랐다. 물론 화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단순한 평론가들이 거기에 무수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수천가지 말이 아닌 그림으로 많은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 그것만으로 화가들은 천재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천재 화가의 그림들을 소재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엮어낸 작가의 상상력과 노력에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김홍도와 신윤복, 중,고등학교 때 그냥 미술책에서 스쳐지나갔던, 아니 시험 문제에 종종 나왔던 익숙하면서도 너무도 낯선 두 화가의 작품을 이렇게 다양한 해석과 더불어 만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동양화-특히 우리나라 그림을 이야기할 때 그저 산수화, 수묵화에 묻혀 미쳐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던 인물화에 대한 거나, 색깔에 대한 것들도 많이 알게 되어서 그 점이 새삼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정말 우리나라 그림에 대해서 난 정말 무지했구나...)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한글 창제라는 걸 둘러싸고 보여주는 치열한 정치 싸움에서 고뇌하는 세종과 이를 둘러싼 살인 사건과 사건의 본질에 다가서는 겸사복 강채윤과 무수리 소이를 통해서 풀어낸다면 바람의 화원에서는 정조 시대라는 시대의 격동기에서 기득권과의 싸움 속에서 고뇌하며 변혁을 갈망하는 정조와 기존의 화풍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김홍도, 기존의 화풍의 틀을 과감히 부수고 세상 속으로 뛰쳐나간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리고 10년전 살인사건에 숨겨진 무수한 정치적 대립과 기득권과의 싸움, 그리고 태생적 비밀까지.... 전체적으로 캐릭터들의 감정선이 풍부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긴박하게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듯 하면서도 두 사람의 그림처럼 전체적으로 여백이 느껴지는 편안한 이야기 구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작가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번역체의 냄새가 안나는 문장과 단어 선택! 정말 한국 소설을 읽는 거 같아서 좋았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캐릭터는 역시 김조년, TV에서는 청년의 느낌이었는데 소설을 읽으니 조금 나이지긋한 느낌으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김홍도나 신윤복과 대립하면서도 그들의 재능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이 정말 드라마틱했다. 마지막 대결의 반전이야말로 이 소설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기득권과의 싸움이라는 게 어느 시대에든 존재하며 그것이 단순히 정치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실감했다. 그건 아마도 대한민국 전체를 충격과 슬픔에 빠뜨린 사건과 맞물려서 더욱 그랬던지 모르겠다. 여기서는 어진화사라는 화원들의 일생일대의 꿈의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정치적인 싸움 뿐만 아니라 기존 화풍과 이에 반하는 화풍 간의 대립을 통해 팽팽한 긴장감을 그려내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생각하기엔 완전 억지 같은, 하지 많아야할 많은 것들... 이를테면 여자의 초상화를 그리면 안된다던가, 색깔에 제한이 있다던가... 제도권이 만들어놓은 틀이라는 건 화가의 그림 한 점, 소설가의 문장 하나, 단어 하나까지 구속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난다는 건 곧 제도권에서의 이탈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추방 혹은 죽음-반드시 육체적인 죽음 뿐만 아니라-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 나 역시 그런 제도권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에만 몰두하는 게 아닌가 두렵다 아니, 감히 그 틀을 부수고 뛰쳐나가려는 용기의 한 조각조차 없는 존재로 변해가는게 두렵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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